번아웃을 약으로 버틸 때, 약물 의존이 시작되는 자리
처음엔 그냥 버티려고 먹었을 겁니다. 잠이 안 와서, 아침에 눈이 안 떠져서, 회의 때 머리가 안 돌아가서.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약이 있어야 하루가 시작되고, 없으면 하루가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합니다.
버티려고 먹기 시작한 약
번아웃이라는 말이 흔해졌습니다. 열 중 일곱이 겪는다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번아웃을 말할 때 사람들은 보통 쉬지 못하는 이야기, 의욕이 사라진 이야기까지만 합니다. 그 사이에서 무엇으로 버티고 있는지는 잘 말하지 않습니다.
일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밤에 잠이 안 오면 자는 약을 찾고, 낮에 멍하면 깨우는 것을 찾습니다. 처방받은 것일 수도 있고, 약국에서 산 것일 수도 있고, 누가 좋다고 해서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작은 대개 아주 상식적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의지가 약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지키려던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버티는 방식이 몸에 남는다는 데 있습니다.
약이 나쁜 게 아니라, 쓰임이 바뀝니다
의존이 시작되는 자리는 약 자체가 아니라 약을 쓰는 방식이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증상을 다루려고 먹던 것이, 어느새 하루를 굴리기 위한 연료가 됩니다. 이 변화는 하루아침에 오지 않습니다. 몇 주, 몇 달에 걸쳐 조금씩 옮겨 갑니다.
| 처음 | 시간이 지난 뒤 | |
|---|---|---|
| 먹는 이유 | 오늘 잠을 자려고 | 내일 일정을 감당하려고 |
| 먹는 시점 | 증상이 있을 때 | 증상이 오기 전 미리 |
| 양을 정하는 기준 | 안내받은 대로 | 내 느낌대로 조금씩 |
| 안 먹은 날 | 좀 뒤척였다 | 하루 전체가 불안하다 |
오른쪽 칸이 익숙하다고 해서 그 자체로 어떤 진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몸이 약을 전제로 하루를 짜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수는 있습니다. 그 신호를 알아차리는 시점이 빠를수록 선택지가 많습니다.
혼자서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유
약물 의존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건, 겉으로 보면 오히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출근도 하고, 마감도 맞추고, 사람들 앞에서 웃기도 합니다.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주변에서도 묻지 않습니다.
상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는 보통 약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잠이 안 온다, 요즘 너무 지친다, 아무 감정이 안 든다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약 이야기는 한참 뒤에, 조심스럽게 나옵니다. 말하면 혼날 것 같다는 마음이 그만큼 큽니다.
이런 말들이 스스로에게서 나올 때는, 한 번쯤 멈춰서 들어볼 만합니다.
- 남은 개수를 자주 세어 보게 됩니다.
- 여행이나 출장을 잡을 때 약이 충분한지부터 확인합니다.
- 병원이나 약국을 한 곳만 가지 않게 됩니다.
- 가족이나 동료 앞에서는 먹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합니다.
- 오늘은 안 먹어야지 생각했다가, 저녁이면 이유가 생깁니다.
여기에 해당한다고 해서 스스로에게 어떤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름보다 중요한 건, 지금 그 약이 무엇을 대신하고 있는지입니다. 쉬는 시간을 대신하고 있는지, 거절하지 못한 업무를 대신하고 있는지, 말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하고 있는지.
줄이는 일보다 먼저 할 것
많은 분들이 결심부터 합니다. 내일부터 끊겠다고요. 그런데 몸에 익은 약을 갑자기 멈추면 잠이 더 안 오거나, 불안이 더 커지거나, 몸이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먹게 되고, 이번엔 자책까지 얹힙니다. 끊었다 다시 먹는 일이 반복될수록 말을 꺼내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순서를 바꾸는 편이 낫습니다. 양을 조절하는 일은 처방한 곳과 상의해서 천천히 다루고, 그 전에 왜 이만큼 버텨야 했는지를 먼저 꺼내 놓는 겁니다. 번아웃이 풀리지 않은 채로 약만 빼면, 빈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오기 쉽습니다. 술이 되기도 하고, 밤새 보는 화면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해볼 만한 건 크지 않습니다. 최근 일주일 동안 며칠 먹었는지, 어떤 날 더 손이 갔는지 메모 앱에 날짜만 적어 보는 것. 그리고 끊겠다는 말 대신 요즘 이런 걸로 버티고 있다는 문장을 한 사람에게만 말해 보는 것. 그 두 가지만으로도 혼자 지고 있던 무게가 조금 줄어듭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약을 평소보다 많이 먹었거나, 견디기 힘든 생각이 올라오는 밤이라면 혼자 버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 정신건강 위기상담 1577-0199로 연결할 수 있고, 청소년이라면 1388도 있습니다. 전화로 몇 마디만 해도 됩니다.
맘블리에서는 약을 몇 알 먹었는지부터 따지지 않습니다. 어떤 날에 손이 가는지, 그 하루가 왜 그렇게 무거웠는지부터 같이 정리해 갑니다. 오늘 말로 꺼내기 어렵다면, 먼저 적어 두는 것만으로도 시작은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처방받은 약인데도 의존일 수 있나요?
처방받은 약이라도 쓰는 방식이 달라지면 몸이 그 약을 전제로 하루를 짜게 될 수 있습니다. 정해진 양보다 조금씩 늘리거나, 증상이 없는데도 미리 먹게 되는 패턴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임의로 중단하는 것은 오히려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처방한 곳에 지금의 복용 양상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번아웃 때문에 약을 먹는 건데, 일을 그만둬야 하나요?
대부분은 당장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라 약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퇴사 여부를 먼저 정하기보다, 지금 무엇이 가장 많이 깎여 나가는지를 구분해 보는 편이 낫습니다. 수면인지, 거절하지 못하는 업무량인지, 사람과의 마찰인지에 따라 다룰 지점이 달라집니다. 상담에서는 보통 그 구분부터 함께 합니다.
가족이 약을 자꾸 숨기는 것 같은데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개수를 세어 보거나 추궁하는 말로 시작하면 대화가 닫히기 쉽습니다. 약 이야기보다 요즘 많이 지쳐 보인다는 말, 잠은 좀 자는지 묻는 말이 먼저 들어갑니다. 본인도 이미 걱정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말이 어렵다면 가족이 먼저 상담을 받아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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